카테고리 없음 / / 2023. 2. 28. 23:12

<명> 주원장, 대항해, 비대와 신사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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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때 지어진 현존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 자금성

명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명을 세운 주원장

원 말기 정치경제 혼란은 심해지고 황허강까지 범람하여 많은 사람이 굶주렸다. 주원장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살 길이 없자 절에 들어갔다. 하지만 절도 끼니를 해결할 길이 없자 여기저기 떠도는 탁발승이 되었다. 그러던 중 홍건적에 합류하게 되었다. 홍건적은 혼란한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일어난 농민들이었다. 머리 좋고 용감했던 주원장은 홍건적 지도자에게 총애를 받아 그의 양딸과 결혼했다. 그 후 지도자가 죽어서 주원장이 그 자리를 차지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주원장은 난징을 통치하면서 야심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홍건적의 한계를 느꼈다. 비록 신념이 있는 홍건적이었지만 도적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식인과 부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경쟁자인 다른 홍건적을 쳐서 없애 버렸다. 자신도 홍건적과 결별하고 1368년 새로운 왕조인 명을 세웠다. 황제가 된 주원장은 연호를 홍무로 지어 홍무제가 됐다. 황제는 권력강화를 시키기 위해서 명을 세울 때 자신을 도왔던 강남의 지주층과 장군들을 숙청했다. 또한 관료들을 감시하는 기관도 만들고 군대지휘하는 권한을 분할하여 군인반란가능서도 없애버렸다. 철저하게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홍무제는 백성들에게는 가난의 고통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중앙에는 국자감을 두고 지방에는 부학 주학 현학 등 학교를 두어 유교교육을 강화시켰다. 

영락제와 정화의 대항해

주원장은 자신의 첫째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고 나머지 아들들은 몽골침략을 막기위해 국경 지대에 보내졌다. 하지만 주원장 아들이 죽자 황태손이 황위에 올라 건문제가 되었다. 건문제는 국경을 지키는 삼촌들의 존재가 무서웠다. 특히 베이징 쪽 만리장성을 지키던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연왕이 두려운 건문제는 연왕에게 반란을 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연왕은 황제 주위에 악의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3년간 전투 끝에 난징을 점렴했다. 건문제는 스스로 황궁을 불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어서 연왕이 황제인 영락이 되어 난징의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정치안정을 펼치기 위해 연락대전을 편찬했다. 영락제는 명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몽골 침입을 막기 위해서 5차례나 직접 전쟁에 나가기도 했다. 물길이 막힌 대운하를 보수하고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겨 큰 도시를 건설했다. 이때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최고의 건축물인 자금성을 건축했다. 14년 동안 공사기간 100만 명 800채 건물과 9000개 방이 있는 자금성이다. 명에 이어 500년 동안 24명의 중국 황제가 머물렀다. 영락제는 대외 원정에도 열심히 했다. 환관 정화에게 명하여 대규모 함대를 이 끌로 대항해를 했었던 것이다. 이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3차 항해까지 했는데 최종 목적지는 인도 서쪽해안 캘리컷이었다. 정화는 무역보단 명에 조공을 권했다. 이에 따라 30개국에서 조공을 받으며 국력을 과시했다. 그 후엔 무역에 관심이 없어서 교역을 통제했다. 그래서 대항해 시절 활동한 상인들은 자신의 거처를 해외에 자리 잡고 돌아오지 않고 상업 활동에 이어나갔다. 그들을 화교라고 부른다. 

 

신사층

홍무제와 영락제로 인해서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이였다. 이로 인해 황제가 직접 6부를 관장했다. 혼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 관료를 두었는데 그들을 내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관리들은 후대로 갈수록 점점 권한이 확대되어 6부를 능가하게 되었다. 1440년경 몽골의 일족인 오이라트가 세력을 점점 키우더니 조공을 빌미로 전쟁을 벌였다. 조공을 바치면 황제는 하사품으로 비단이나 도자기를 주었는데 오이라트가 말 2천 마리 보내고 3천 마리라고 속였다. 그로 인해서 다툼이 시작됐는데 환관 왕진이 황제에게 직접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조언을 해 출정했다가 오이라트의 포로로 잡혀버렸다. 황제를 포로로 잡은 오이라트는 황제를 돌려보낸 조건으로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명은 이미 새로운 황제를 새웠다. 그로 인해서 오이라트는 아무 소득도 없이 되돌아가고 황제는 명으로 돌아와 난징에 머물렀지만 새 황제가 병에 들어 죽자 다시 황제가 되었다. 그게 명의 6대 황제 정통제다. 영락제 이후 황제들은 나라를 잘 돌보지 못했다. 능력 있는 신하들 중 장거정은 내각의 수장 자리에 앉은 뒤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장거정의 정치 개혁은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아 비롯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중앙 집권적 지배를 강화했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고 나서 더 이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관료들의 정치 다툼으로 점점 정치적 혼란이 심각해졌다. 이에 반발한 강남의 신사층은 권력을 나누고 신하들의 의견을 반영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신사층은 중앙 국가 권력을 보좌하여 향촌사회에서 중간 지배층 역할을 했다. 신사층은 중앙 권력의 탄압을 받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명을 원만하게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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