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 배경
중세시대에는 봉건제사회이다. 봉건제도란 가톨릭 교회에서 위계서열을 근간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절대왕정시대를 맞이한다. 절대 왕정 또는 절대주의는 왕의 힘이 막강한 정치체제이다. 봉건사회에서 절대왕정체제로 변경된 이유는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장원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잦은 전쟁으로 귀족들의 권력이 약해진 이유도 있다. 그리고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서 엄청나게 벌이들인 돈은 왕권강화 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 것이다. 이러면서 유럽 여러 나라들은 전제정치를 펼쳤다. 전제정치는 왕이 곧 법이기 때문에 군대, 입법, 행정, 조세 등 국가를 다스릴 때 필요한 핵심기능을 왕이 직접 관리를 했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상주의정책을 펼쳤었다. 이런 중상주의정책과 식민지개척 사업으로 유럽국가들은 절대주의를 펼치면서 경제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절대왕정 에스파냐
에스파냐는 절대왕정체제를 갖춘 가장 먼저 시작한 나라이다. 당시 카를로스1세가 에스파냐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 시절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를로스 1세는 네덜란드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때마침 신성 로마제국을 다스리던 할아버지 뒤를 이어 신성 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카를로스 1세는 에스파냐, 네덜란드, 신성 로마제국까지 다스리게 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일부 지역까지 상속받고 중남미와 아프리카 식민지까지 카를로스 1세는 엄청나게 많은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므로 인해서 카를로스 1세는 영토를 지키는데 힘을 써야 했고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국가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집권 중에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벌어졌지만 12년 휴전 조약을 체결해서 잠시 전쟁을 미뤘지만 1648년 다시 전쟁 이후로 네덜란드는 독립을 하게 됐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써 이슬람 세력인 이슬람 제국과 전쟁을 치러야 했고 종교 개혁으로 일어난 신교 세력과도 전쟁을 치르고 왕권강화로 인해서 부담스러워진 세금으로 반발한 내부 반란까지 카를로스 1세는 이들 모두 성공적으로 진압해서 에스파냐의 절대 왕정 시대를 열었다.
절대왕정 영국
1455년~1485년 영국에서는 왕권을 두고 내전이 일어났다. 이름하여 장미전쟁이다. 장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왕위 계승문제로 인해서 100년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장미전쟁은 백년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나지도 않아서 바로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100년 전쟁은 프랑스 승리로 끝났다. 전쟁에서 진 영국은 헨리 4세부터 헨리 6세까지 전쟁이 있었는데 전부 랭커스터 가문에서 나온 왕들이었다. 전쟁에서 진 책임을 두고 요크가문등 귀족들은 랭커스터 가문을 비난했고 랭커스터 가문은 이를 정면 받아쳤다. 그래서 결국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명목은 100년 전쟁에서 패배의 책임을 지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 이 전쟁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두 가문은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 가문을 상징했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고 불리었다.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이 헨리 튜터 승리로 이끌었다. 헨리 7세는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이게 바로 튜터왕조이다. 튜터왕조는 왕권강화를 통해서 절대주의 기초를 쌓았다. 영국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왕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왕이 되자마자 자신에게 충실한 신하만 남긴 체 전부 쫓아냈다. 그리고 수장령을 부활시켜 절대 왕권강화를 했다. 한편 유럽강국의 최대 번영을 누리고 있는 에스파냐 왕인 펠리페 2세의 청혼에도 엘리자베스 1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과 결혼했다는 말과 함께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이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열심인 국왕은 중상주의를 펼치며 해상무역 강국인 에스파냐와 해상전쟁에서 이기며 새로운 해상강국으로 떠로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영국은 급 경제 발전을 하게 됐고 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갑자기 올라간 물가로 서민들은 고통을 받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절대주의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