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3. 2. 28. 00:44

<일본> 에도막부 시대, 새로운 통치 방법, 조닌문화, 교류로 학문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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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킨코타이 행렬

에도막부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전 막부시대와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알아보자.

 

에도 막부의 새로운 통치방법

에도 막부는 메이지유신 시작되기 전까지 평화롭게 질서를 지키며 유지했다. 260년 동안 지속됐었는데 그 이유는 막부의 엄격한 통치 방법에 있었다. 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이 힘과 경제력을 가지면 반란을 일으키기가 쉬워지니 다이묘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억제시키는 정치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선 전국의 땅을 300개로 쪼개고 직접 영주를 임명했다. 작게 쪼개진 땅을 번이라고 하고 각 번의 자치를 인정해 주었다. 이것을 막번체제라고 한다. 하지만 가번을 등급을 매겨서 충성도에 따라 나눴다. 도쿠가와 가문이 최고의 등급의 다이묘로 임명되어 쌀생산이 잘되고 좋은 땅을 받았다. 반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반대편에 있던 다이묘들은 등급이 낮았다. 낮은 등급은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받았고 충성도가 떨어지면 영지 몰수당하거나 다른 영지로 보내기도 했다. 다이묘의 경제력을 가장 쉽게 약화시킨 건 '산킨코다이'와 '후신야쿠'라는 제도이다. 산킨코다이는 다이묘들의 후계자와 부인을 에도에 살게 하고 1년에 한 번씩 에도로 와서 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제도이다. 때문에 행렬을 하기 위해서 돈을 어쩔 수 없이 많이 쓰게 되고 후계자와 부인도 에도에 살려면 돈을 많이 쓰게 된다. 후신야쿠는 막부의 성곽등 수리할 때 공사비를 다이묘들이 부담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막부 초기 강력한 무단정치로는 안정된 정치를 이끌 수 없어서 유교를 받아들이며 덕치주의 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50년마다 정치 개혁을 실시하게 됐다. 농본주의 원칙의 막부 체제는 서서히 상업 자본주의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발달과 조닌문화

에도 중기 시대에는 상업이 더욱더 발전했다. 제일 먼저 상업 발전을 이끈사람은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였다. 예전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하게 여겼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실용성과 합리성을 중요시해서 상업 활동을 장려했다.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유통의 중요성을 알고 무역으로 인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본을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려고 구상한다. 각 지역에 남은 쌀을 오사카의 시장으로 보내어 판매하고 다시 필요한 곳으로 보내도록해서 전국의 상품들이 오사카로 모여들었다. 그로 인해서 점점 더 큰 도시로 발전했다. 또한 산킨코타이는 상업을 더욱더 발달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1년에 한 번씩 행렬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다 자연스럽게 도로와 교통망이 정비됐고 에도로 가는 길목마다 여관과 식당이 들어섰고 중앙과 지방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리고 농업도 크게 발전했다. 모내기 도입과 농기구발달 농지개간등으로 인해서 쌀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그로 인해서 먹고살기 좋아지니 인구가 두 배이상 늘었다. 이런 에도시대에 경제 번영으로 인해서 성장한 상인과 수공업자 계층을 조닌이라고 한다. 

 

외국과 교류로 발전한 학문

에도 시대의 일본은 쇄국정책을 펼쳤었다. 하지만 외국과 완전히 교류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교류가 끊어졌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뒤 도쿠가와 가문은 전쟁 포로의 소환 문제로 처리 과정에서 조선과 강화를 맺었었다. 또한 조선에서 통신사라 불리는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는데 매우 정중하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런 통신사를 통해서 많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게 이본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리학은 나라에 충성할 것을 강조하고 신분에 맞게 질서를 중요시하는데 통치자는 신분제를 단단히 다질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사상이었다. 특히 외국과의 교육이 늘어나면서 네덜란드 상인과 교류도 활발했다. 다른 유럽상인들은 포교활동을 했지만 네덜란드는 선교에 관심이 없어서 독점적으로 교역을 하게 됐다. 네덜란드 상인들도 나가사키 항구에서만 교역할 수 있었다. 일본은 데지마라는 인공섬까지 만들어서 네덜란드 상인들이 그곳에서만 머물도록 했다. 크리스트교 포교를 막기 위해서였지만 호기심 많은 일본 지식인들은 데지마를 드나들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했으며 이것을 난학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서 1만여 권의 책이 들어와 번역되고 쇼군의 지지를 받아 의학 천문학 지리학등 크게 발전했다. 훗날 이러한 낙학의 발전이 일본이 근대화를 받아들이고 준비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하지만 난학반대하는 국학이 발달하기도 한다. 이런 경제적 번영과 학문 문화 발달 속에서 260년 지속되었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다양한 경제문제 발생하고 농민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차츰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에도 막부는 1854년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한 뒤 15년 만에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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