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3. 2. 26. 01:34

<일본> 일본 문화 탄생, 다이카 개신,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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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 변

왕권 강화를 추진했던 쇼토쿠 태자가 세상을 떠난 뒤 외척 세력인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소가 가문에 대항하는 정변이 일어나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일본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다이카 개신으로 일본 탄생

쇼토쿠 태자가 왕권강화를 했지만 세상을 떠난후 다시 소가 가문의 힘이 나날이 커져갔다. 왕실과 귀족은 소가 가문의 권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소가 가문을 없애 버릴 계획으로 소가가문을 대항하는 호족 세력들과 연합을 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삼국사신 왔다는 거짓정보로 소가 가문을 왕궁에 불러드린 뒤 그들은 모두 제거해 버렸다. 나카노오 황자는 고토쿠왕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이에 수와 당에서 정치와 문화를 배워 온 유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정부 개혁을 발표한다. 이게 바로 다이카 개신이다. 그 핵심 내용은 모든 토지와 백성은 왕의 것이라는 것이다. 개혁을 주도한 나카노오 황자는 솔선수범하여 자기 토지를 전부 국가에 바치고 호족들의 토지도 바치게 했고 이에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 관직과 토지를 다시 주는 식읍제도를 실시했다. 이에 왕권이 강화되고 호족은 자연스럽게 약화 됐다. 7세기말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 통일을 시켜서 백제가 멸망하자 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과 백제는 긴밀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백제 부흥 운동을 돕기 위해서 3만여 명 구원병과 4백 척의 배를 백제에 보냈지만 백강 하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백제를 도운 일을 빌미로 나당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해올까 봐 일본의 나카노 오는 황자에서 직접 왕에 자리에 오르며 덴지왕이 되어서 전쟁을 대비했다. 백제 지식인을 동원하여 방어 시설과 성을 쌓고 국방을 정비했다. 또한 호적을 정리하여 정확한 세금과 전쟁이 나면 정확힌 사람인원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계획을 할 수가 있었고 일본 전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정작 당 지역에서 유목민들의 마찰로 인해서 일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덴지왕이 세상을 뜨자 그의 동생 오아마 왕자가 조카인 덴지왕의 아들, 오토모 왕자에게 왕위를 빼앗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진신의 난이다. 그는 아스카에서 즉위하여 덴무 천황이 되었고 이때부터 왕을 천황이라 부르고 나라이름도 니폰(일본)이라고 바꿨다. 덴무 천황은 당을 본보기로 율령 반포하고 관료 체제도 정비했다. 율령 정치가 안정되고 천황의 권력이 강해지자 관청과 관리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수도인 아크사는 포화상태에 이르러 일본 수도를 헤이조코로 옮겼다. 이로 인해서 아스카 시대가 끝나고 나라시대가 사작된다. 

나라시대

야마토 북쪽에 위치한 헤이조코는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받아서 만든 계획적인 도시였다. 일본의 기술력이 많이 부족하여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고 지식과 제도를 받아드리며 많은 노력을 했다. 일본은 견수사 견당사라는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당에서 많은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다.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고사기''일본사기'의 역사책도 편찬했다. 두 역사책에는 신화가 상세히 적혀있는데 이 신화들이 모두 천황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천황이 백성을 지배한다는 것이 정당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도 크게 발전했다. 700년도에는 잦은 재해로 나라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천황은 각지에 사원과 불상을 만들어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극복하려고 했지만 나라 모든 자원을 사원과 불상으로 만들다 보니 경제가 파탄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자 승려들이 정치개입을 하고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천황은 부족한 재정난을 농민들에게 커다란 세금으로 부과했다. 민심이 점점 안 좋아졌고 세금을 피해 달아나 도적이 되는 농민들도 속출했다. 이에 천황은 민심도 달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수도를 다시 헤이안으로 옮겨야 했다. 불교 세력이 강한 헤이조코를 벗어나서 승려들의 정치 개입을 막고 율령제를 다시 부활시켜 재정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나라시대가 끝나고 헤이안 시대가 시작됐다. 

 

헤이안시대

천황은 나라를 새로 정비하고 왕권 강화하고자 헤이안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천황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북지역에 살고있던 에미시를 정벌하고자 했지만 정벌 실패했고 수도를 정비하고자 했지만 귀족들이 반대했다. 또한 당이 혼란스러워지자 사절단 파견도 중단시커 버렸다. 하지만 견당사 제도 폐지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일로 인해서 일본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황궁 중심으로 귀족적인 취향의 일본 고유의 색깔을 띤 국풍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또한 그와 함께 가나문자도 만들어졌다. 이런 국풍문화는 귀족층으로 넓게 퍼져나가 불교 역시 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유의 색채를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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