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지배했던 왕조들과 청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누르하치의 후금
여진족은 전통적인 수렵 위주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이 늦었다. 수렵생활로 인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정착 생활을 했는데도 농사지을 노동력이나 소가 귀 했다. 또한 철제 농기구를 제작할 기술이나 원료가 부족하여 대부분 물자를 수입해야 했다. 그들은 담비 가죽이나 약재, 토산물을 인근 나라에 팔고 쌀, 소금, 농기구등 생활용품을 사 왔다. 이렇게 발전이 늦었는데 11세기 중기에 여진족이 금을 세워 대륙을 지배했다. 거란족의 요와 한족의 송을 멸망시킬 정도였다. 한족은 남쪽으로 달아나 남송을 세워 금과 대치했다. 강한 몽골 등장으로 여진족은 뿔뿔이 흩어져 명시기에는 3개 부족으로 나뉘었다. 명은 여진족의 위력을 알기에 항상 견제했다. 여진족이 몽골 남하를 막아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대신 여진족 단합을 막기 위해 간접 통치했다. 하지만 명 말기에 누르하치가 다시 통합시켰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대로부터 살해당했다. 누르하치는 서러웠지만 조용히 명의 관직을 받아들였다. 조용히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일본이 조선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의 감시가 소홀해진 것을 틈타서 세력을 더욱 확장시켰다.
1616년 드디어 누루하치는 칸의 자리에 올라 금을 세웠다. 이를 후금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명에게 섣불리 대항하지 않고 명에 조공을 바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 명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만주 동남부인 푸순도시를 공격했다. 누르하치의 군대가 명을 크게 이기자 이 기세를 몰아 랴오허강지역까지 세력확장하고 더욱더 명의 군대를 몰아붙여 랴오둥반도 지역까지 점령하게된다. 처음 10만이 나중에는 40-50만 명이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원인은 팔기제라는 새로운 제도 덕분이었다. 이 제도는 누르하치가 창설한 만주족 독자적인 제도인데 중국 정복과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홍타이지의 청 건국
누르하치가 전투중 부상 입고 그해 병으로 죽었다. 원래 막내아들에게 칸의 지위를 줄려 했지만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형제들을 다 죽이고 권력을 잡고 칸으로 즉위했다. 10년 동안 대외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황제가 되었다. 홍타이지는 나라를 청이라 고치고 수도를 랴오닝성 선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청은 만주족을 지배하던 후금에서 벗어나 만주족 한족 몽골 주변 국가들까지 지배하는 다민족 국가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약해져 가는 명을 정복하기 위해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먼저 조선을 침략했다. 이게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그로 인해서 조선은 청을 섬기는 군신관계를 맺었고 명 정복을 위한 재정과 식량을 공급해야만 했다. 준비를 마친 청은 세 차례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을 공격했지만 명의 수도 베이징을 함락하지 못하고 홍타이지는 죽고 말았다. 그의 아홉째 아들이 5살 나이로 재위에 올라 순치제가 됐다. 순치제 숙부가 그를 도와 섭정하면서 명 정복을 주도해 갔다.
강희제와 옹정제 시대이후 청의 몰락
명 말기는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자성의 군대가 베이징을 장악하고 황궁으로 진군하자 명의 마지막황제는 자금성을 내려보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만리장성 동쪽끝인 산하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베이징이 함락되자 청에 도움요청해 청과 함께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그로 인해 베이징을 장악한 청 군대는 단시간에 질서를 회복하고 달아나던 이자성을 붕괴시켰다. 청은 마지막 관문인 명의 황족들이 세운 남명을 정복하는 일과 향촌의 지배세력인 신사층을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항복하는 사람에게 너그럽게 해 주고 한족의 재산과 기득권도 보장해 주었다. 단 만주족에게 복종한다는 의미로 남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변발을 해야 했다. 끝까지 굴복 안 하는 한족으로 인해서 그 세력이 완전히 없어지기까지 18년이란 시간이 들었다. 16세가 된 강희제는 권력을 쥐고 있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신하를 체포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그 후 60년 통치동안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이로써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모든 면에서 강력한 국가를 이룩했다. 강희제가 죽고 강희제의 넷째 아들 옹정제가 5대 황제로 칭했다. 그는 13년 통치를 했지만 적절한 개혁으로 나라를 더욱더 안정시켰다. 옹정제는 매우 성실하고 열심했던 황제였다. 하지만 옹정제의 정책은 토착민들의 권한을 빼앗는 정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소수 민족들의 관료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이로서 독재 군주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혼란을 줄일 수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일만 하던 옹정제는 58세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건륭제 말년, 잘못된 인재 등용과 건륭제의 사치와 부패로 민심이 돌아섰고 백련교도의 난을 비롯해 바란은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청은 점점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가 서양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그로 인해 영국은 중국과 무역에서 계속 적자를 보자 영국은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대책으로 인해서 청의 몰락을 가져온다. 그의 대책은 아편전쟁이다.